[정의] : 조선 중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승려이자 승병장.
[가계] : 속성은 박씨(朴氏)이고,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기허(騎虛)이다.
[활동사항] : 계룡산 갑사에서 출가한 뒤 사명대사 유정(惟政)과 함께 서산대사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법을 깨우쳐 휴정의 제자가 되었다. 공주 천련암(天蓮庵)에 있으면서 선장(禪杖)을 가지고 무예를 익히기를 즐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 수백 명을 규합하였는데, 이때 승병을 조직한 것은 영규가 최초로서 전국에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관군과 더불어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을 공격한 영규는 다시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힘을 합쳐 청주성을 탈환한
후, 1592년 8월 18일 조헌과 함께 금산성 전투에서 최후까지 왜군과 맞서 호남 침공을 저지하였다.
그러나 부상을 입고 그 해 8월 20일 현재의 비각이 있는 자리에 돌아와 숨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묘소] :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5번지에 있으며, 최근에 묘역을 정비하였다.
봉분과 상석 사이에 있는 높이 87㎝, 너비 37㎝, 두께 14㎝의 묘비 앞면에는 “의병승장군영규지묘
(義兵僧將軍靈圭之墓)”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칠대방손박경진경태봉사(七代傍孫朴景震景兌奉祀)가
묘비를 세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승병장이었던 영규대사를 기리는 사우(祠宇)와 정려(旌閭)는 많은 편이다.
영규대사가 전투를 벌인 금산 지역의 종용사에 영정을 배향하였고, 1738년(영조 14) 영규대사가 불도를 닦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사에 표충원을 세우고 임진왜란 때 왜적을 맞아 싸운 승병장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함께 영정을 배향하였다.
갑사 표충원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2호로 지정되어 있다.
1813년(순조 13) 명정을 받아 충청남도 계룡면소재지 우체국 옆에 영규대사 정려를 세웠다.
정려비각은 최초 건립 연대가 불명확하며 현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