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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화폐의 역사

by 춘치 2020. 4. 30.



우리나라 화폐의 역사

 

우리나라 고대화폐는 기원전957년 기자조선에서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철전이 사용되었다는 것과 신라에서는 금은 무문전을 사용하였다는 등의 기록은 있으나 그 실물은 전해오지 않는다.

고려 성종(996년)에 처음으로 화폐를 제조하기 시작하여 고려 왕조에는 동국(東國), 해동(海東), 삼한(三韓)전, 조선시대에는 조선통보(朝鮮通寶), 상평통보(常平通寶)외에 몇 종류의 이른바 엽전들이 주조, 유통되었다. 그 후 고종19년(1882년)에 비로소 서양식 화폐제도를 도입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주화와 같은 압인식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의 경화(硬貨)를 근대주화라 한다.

 

고려시대의 화페

고려시대 주전(鑄錢)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는 성종(成宗) 15년인 996년에 주철전(鑄鐵錢)방원적용(方圓適用)이 있으나 실제 전문(錢文)에 대하여는 알수없다. 1910년 개성부근의 고려고분에서 무문철전(無文鐵錢)건원중보(乾元重寶)철전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무문철전은 방공원형의 형태을 갖추었지만 조잡한 타조전(打造錢)으로 보아 관조전이라 여기기 어렵지만 주조전인 건원중보는(背 '東國'字) 관주전이라 여겨진다.

무문전(이 무문전은 성종 15년 철전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추정)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건원중보의 앞면과 뒷면

 

건원중보(乾元重寶)는 중국의 당숙종 건원 2년(759)부터 주조된 것인데, 이 전문을 모방하니 중국전과 고려전의 구별이 어려운 관계로 뒷면의 '東國'자를 앞면으로 내어 '東國重寶'를 만들었지 않았나 추즉되어진다. 이는 거자(巨字) 동국중보의 서체와 모양이 거의 건원중보 背'東國' 錢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동국통보(東國通寶)

 

이로부터 숙종연간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東國通寶), 해동원보(海東元寶),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등 전명(錢名)별로만 8종이 주조되었다.

         해동원보(海東元寶)                                               해동중보(海東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삼한중보(三韓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조선시대의 화폐

조선왕조에서는 '조선통보', '십전통보', '상평통보'를 발행하였다. '조선통보'는 세종 5년(1423)에 해서체로, 인조 11년(1633)에 8분 서체로 각각 발행하였으며, '십전통보'는 효종 2년 (1651)에 발행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폐를 대표할 수 있는 '상평통보'는 숙종 4년(1678) 이후 고종 25년(1888)까지 200여년동안 주전소(鑄錢所), 전가(錢價), 서체(書體), 부호(符號), 천자문순(千字文順), 숫자순, 오행순(五行順) 등으로 나뉘어져 약 3000여 종류가 발행되었다.

 

1. 조선통보(朝鮮通寶)

조선통보는 世宗 5년(1423)부터 仁宗朝간에 걸쳐 주조된 것으로 알려져있는 해서(楷書) 조선통보(朝鮮通寶)와 팔분서(八分書) 조선통보(朝鮮通寶)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모두가 소형전이며 대형전으로는 배면(背面)에 '호일전'(戶一錢)이라 새겨진 것과 무배자(無背字)인 해서전(楷書錢)과 배면에 '十'자가 새겨진 팔분서전(八分書錢)이 있는데, 이들은 시주화(試鑄貨)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조선통보 시주화에는 고종(高宗) 18년(1881년)에 소형전이 있는바 이것은 상평통보(常平通寶)의 모전(母錢)과 유사하다. 

조선통보(朝鮮通寶)

 

2.십전통보(十錢通寶)

효종 2년(1651) 7월 우의정 한흥일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의 사주전(私鑄錢)이 허락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화폐유통을 적극 장려할 목적으로 '행전사목(行錢事目)'을 제정 실시하였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백성들이 동전 50문씩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상의 사주전허락은 50문씩 동전을 지니고 다녀야 되는 의무수행에 따른 불편을 덜기 위하여 '십전통보(十錢通寶)'를 주조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십전통보(十錢通寶)

 

 

3. 상평통보(常平通寶)

조선시대 중기에 접어들면서 주조. 발행된 상평통보는 기록으로 보아도 우리 나라 화폐사상 최장기간 유통된 화폐였다. 둥근 모양으로 가운데 구멍이 뚫린 이 돈은 전면에 상평통보(常平通寶)라 쓰였으며 배면(背面)에는 주전소의 약호,숫자,천자문,부호의 표시등 다양하게 변화하는데, 이 변화에 따라 세분하면 무려 3,000여종이 된다.

상평통보(常平通寶)

 

근대의 화폐

근대의 화폐는 개항 이후 대동은전(大東銀錢)이 발행된 1882년부터 일제의 강점(1910~1045) 이전까지이다. 근대화폐 제도의 수용은 조선 말기 당백전(當百錢) 등의 통용으로 화폐제도가 어지러워지자 체제와 품질이 통일되고 운반이 편리하며 가치가 안정된 근대 금촵은 본위 화폐제도를 도입, 실시하여 선진 여러 나라와 통상 거래에서 생겨나는 장애와 경제적 손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책은 열강의 이권에 따라 변화되었다. 근대화폐의 제조는 대동은 전부터 시작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폐기관인 전환국을 설치하여 1891년에 은본위 화폐제도를 공포하고인천 전환국에서 은전(銀錢)을 비롯한 백동전(白銅錢), 적동전(赤銅錢), 황동전(黃銅錢) 등 5종의 근대 화폐를 만들었다.

대동은전(大東銀錢)

 

당백전(當百錢)

 

일제하의 화폐

한일합병이후 1년만인 1911년에 일제는 조선은행법을 공포하여 시행함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구)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이후에 일제시대에 발행되었던 화폐는 조선은행권이었으며, 해방 잔까지 19종의 화폐가 만들어졌다.

경성전환국 화페

인천전환국 화폐

용산전환국 화폐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 의뢰하여 제조한 화폐

 

조선은행권은 1914년에 대흑천상(大黑天像)을 초상으로 하는 백원권이 발행되었으며, 1915년에는 일원권, 십원권을 만들었다. 그 뒤 조선은행권은 계속 발행되어 만주지방과 중일전쟁 때에는 중국 본토에까지 유통되었으며, 그 발행고는 (구) 한국은행이 제일은행으로부터 인계받은 발행고 1180여 만원에서 광복 때에는 49억원으로 증가하였다.  

  

백원권(1914.09.01)                                            일원권(1915.01.04)

-해방전 조선 은행권-

 

조선은행권은 일제 말기에 전쟁의 영향으로 일본 내각인쇄국에서 발행되었던 것이 한국 내에서 발행하게 되었으며, 많은 은행권의 필요로 고액의 천원권(1944년)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천원권은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로 발행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부터 화폐발행이 급격히 늘어나 해방 직후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게 되었다.

 

미 군정하의 화폐

1945년 광복 뒤 남한에서는 미 군정이 실시되었으나 그해 11월「미군정법령」 제21호에 의해「조선은행법」이 존속되어 조선은행권은 계속 유통되었다.

 

-광복후 처음 발행된 은행권-

한편 통화 발행고는 광복 직후 미 군정의 거액 지출과 전후 경제 질서의 혼란 등으로 인해 급격하게 팽창되었다. 급격한 통화 팽창에 따라 조선은행권의 중심권의 종류도 저액권에서 고액권인 100원권으로 이행되었다. 은행권은 1945년 9월 이후부터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인쇄, 발행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을 100원권이 발행되었고 이어 을 1원권과 갑 10원권, 을 5원권, 을 10원권, 병 10원권 그리고 병100원권 등이 1946년 5월까지 8개월 동안에 속속 발행되었다. 1946년 이후에도 정 100원권과 정 10원권이 발행되었으며 뒤이어 이면의 색채가 변경된 무 100원권이 발행되었다.

-조선은행권의 쇄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화폐

1948년 8월 정부 수립 직후에는 당시 유일한 법화인 조선은행권이 사실상 무제한으로 발행되었고 1942년 이후에는 은행권 발행에 있어서 '최고 발행액 제한 제도'가 운용되었다. 광복 뒤에도 바로 중앙은행법이 제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법제면에서는 '최고 발행액 제한 제도'가 계속적으로 적용되었으나 정치.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자금 수요에 따른 현금 부족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급히 은행권을 새로 발행하여 이미 발행된 조선은행권과 함께 통용시켰다. 

-1차통화조치후 한국은행권-

 

한국은행은 갑작스러운 6.25동란으로 은행에 남아 있던 조선은행권을 미처 폐기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적성통화의 유통을 막아 적군의 경제 교란 행위를 봉쇄하기 위해 1950년 8월 28일「대통령 긴급명령」제10호로 '조선은행권의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제1차 통화조치'를 취하였다.

휴전협정 체결 직전인 1953년 2월에는 재정, 금융 및 산업 활동을 안정시키기 위해 「대통령 긴급명령」제13호에 의해 '제2차 통화조치'를 취하였다. 따라서 모든 원화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모든 거래와 원화 표시의 금전 채무는 100대 1의 비율로 절하시켜 그 단위를 새로운 '환'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2차통화조치후 한국은행권-

또 '제2차 긴급 통화조치'로 화폐 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었고 새로 발행된 신 한국은행권 1환, 5환, 10환, 100환 등 5종의 화폐가 통용되었다. 

-신종 환화 은행권-

 

-한화 은행권의 체계정비-


-우리나라 최초로 발행된 주화(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이 도안되어 있다)-

-경제질서 확립과 환화발행- 

 


제3차 긴급통화조치이후 한국은행권

정부는 국민경제의 건전한 질서를 확립하고 경제개발 5 개년 계획 수행상의 애로를 제거하기 위하여 1962년 6 월 화폐단위를 환으로부터 원으로 개칭하며 환가 비율을 10분의 1로 절하하는 제 3 차 긴급통화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3차 통화조치는 경제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단순히 화폐의 명목 가치를 절하하는데 그쳤으며, 화폐사적 측면에서는 현용 원화 체계의 도입이라는 의의를 가졌다고 하겠다. 그리고 3차 통화조치에 의해 발행된 은행권은 영국 THOMAS DE LA RUE CO.에서 제조 반입하여 발행한 것으로서 오백원권 , 백원권 및 오십원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판인쇄 방식에 의해 제조된 것으로 비교적 위조가 용이하여 인쇄방법의 개선이 시급한 문제점으로 대두되었다.

-제3차 긴급통화조치후 화폐-

 

1962년 9월 2 일 한국은행은 영국제조권의 국내제조권 대체를 위하여 나 십원권을 발행하였고 같은 해 11월 1 일에는 나 백원권을 발행하였다. 나 백원권은 종전의 백원권과 같은 규격으로 앞면 도안도 독립문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십원권은 소액거래의 중심권종인 십원권의 품위향상을 위하여 규격을 크게 하는 한편 도안에 있어서도 앞면에 첨성대를 사용하여 한국은행 휘장외에는 뚜렷한 도안소재가 없었던 제 3 차 긴급통화조치로 발행한 십원권에 비하여 다양하게 하였다. 이어 1962년 12월 1일 소액거래에 있어서 단수(端數)처리의 편의를 위하여 오십전권과 십전권을 발행하였는데 이로써 원화은행권의 권종체계는 8개권종으로 정비되어 통화조치 이전의 환화은행권 7개권종에 각권종은 물론 새로운 고액권으로서 오백원권을 갖게 되었다.

-영국제조권의 국내제조권대체-

 

1965년 한국조폐공사가 새로운 시설을 도입하므로써 요판(凹板)인쇄가 가능하여지자 한국은행은 요판인쇄권의 발행을 추진하였는데 먼저 1965년 8월 14일에는 다 백원권을 발행하고 1966년 8 월 16일에는 나 오백원 권을 발행하였다. 다 백원권은 국내 제조된 최초의 요판인쇄권으로 도안의 정교화를 기하고자 앞면도안의 소재를 나 백원권 독립문에서 세종대왕 초상으로 변경하였다. 인쇄방법에 있어서 다 백원권은 앞면만 요판 인쇄하였으나, 나오백원권은 앞뒤 양면에 요판 인쇄하였다. 이어 1969년 3월 21일 한국은행은 오십원권의 도안을 다소 변경한 나 오십원권을 발행하였다. 나 오십원권은 소액권종임을 감안하여 평판인쇄방식에 의해 제조하였는데 이로써 1962년 통화개혁으로 발행된 영국제조권 6 개권종중 주화로 대체된 5 원권 및 1원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제조권으로 대체되었다.

-새로운 양식의 은행권발행-

-1966년 발행한 주화(다보탑, 거북선,무궁화)-

 

1970연대에 들어서 급속한 경제개발에 따른 거래규모의 확대와 물가상승으로 고액화폐에 대한 수요가 증대 하게 되자 10,000원권및 5,000원권 고액은행권의 발행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2년 7 월 1 일 오천원권이 발행되었으며 1973년 6 월 12일 만원권을 발행하였다. 오천원권및 만원권은 최고액권이던 500원권에 비하여 액면이 크게 높아지고 위조 방지와 은행권 품질향상을 위하여 한국은행권으로서는 최초로 오천원권은 앞면도안과 같은 율곡 이이의 초상은화(隱畵)를 만원권은 석굴암 보살상은화(隱畵)를 각각 앞면 좌단에 삽입하였다. 1973년 9 월 1 일 새로운 도안의 다 오백원권을 발행하였는데 다 오백원권은 종전 나 오백원권의 전면이 흑색계통으로 되어 있어 사진복사 위변조가 비교적 용이하였던 점을 감안하여 색상을 가급적 다색도로 하는 한편 「한국은행」문자를 부정위치은화로 투입하였다.

-고액은행권의 발행-


-1970년대 동전-

 

한국은행은 고액권용지의 국산화와 표준영정도안의 채택을 위하여 1977년 6 월 1일에 나 오천원권 1979년 6월 15일에 나 만원권을 각각 발행하였다. 종래의 가 오천원권 및 가 만원권 등 고액권은 영국산 수입용지를 사용하였으나 은화용지의 국내생산이 가능하게됨에 따라 은행권용지를 국산화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도안의 표준영정채택을 추진하였다. 표준영정문제는 선현의 동상이나 영정을 제작함에 있어 제작처에 따라 그 모습이 상이하게 되어 물의를 빚는 사례를 방지하기 위하여 1973 년부터 영정제작시에는 정부의 사전 심의조정을 받아 제작하도록 하였다. 화폐도안에 사용된 선현의 초상중 다 오백원권 및 천원권의 도안은 정부의 심의를 거쳐 제작한 것이었으나 가 오천원권 및 가 만원권의 경우 표준영정 심의이전에 이미 제작되어 이의 표준영정 대체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표준영정의 은행권발행-

 

한국은행은 정부의 승인하에 1982년 1월 화폐체계정비계획을 수립 현용화폐의 규격과 도안을 전면적으로 조정한 새로운 은행권 및 주화를 발행하였다. 향후, 현금자동인출기, 자동정사기 등 자동화에 대비하여 위·변조화폐 감별을 위한 특수화학, 기계감응요소를 강화하고 특히 액면을 표시하는 점자를 첨가하여 맹인의 권종구분이 용이하도록 하였으며, 인쇄 적합도등 지질향상을 도모하고 용지의 강도를 강화하여 선진국 수준으로 화폐의 품질을 높였다. 주화에 있어서는 500원 은행권을 대체하여 500원화를 발행함으로써 자동 판매기 보급등에 따른 고액주화 수요에 부응하여 현재 화종별로 다소 불일치 되어있는 문자 및 숫자의 배열 등 주화 도안의 통일성을 도모하였다.

-화폐체계의 정비- 


-1980년대 발행된 동전-

 

컴퓨터 관련기기의 성능향상으로 위조지폐가 급증하고 정교해지는 상황에 대응하여 홀로그램, 색변환잉크, 요판잠상 등 첨단 위조방지장치를 대폭 확대하고 디자인면에서도 예술적 세련미의 문자와 숫자, 총재직인, 점자 등 전체 도안 체계가 현대적 감각으로 대폭 바뀌었다. 은행권의 크기 또한 선진국 수준으로 축소되어 쓰기에 편리해졌으며 소재면에 있어서는 초상인물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여타 소재는 과학, 미술, 사상 등을 나타내는 다양한 소재가 채택되고 참신한 바탕무늬가 사용되는 등 도안 이미지가 복합화 되었다. ‘마’ 5,000원권은 2006년 1월 2일 발행하였으며, ‘바’ 10,000원권 및 ‘다’ 1,000원권은 2007년 1월 22일에 발행하였다.

-첨단 위조방지장치가 적용된 새 은행권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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