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능해 (他人能解)" 는 전남 구례에 있는 운조루의 쌀 뒤주 마개에 새겨진 글자다. 아무나 열 수 있다는 의미로 운조루의 주인이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커다란 뒤주를 사랑채 옆 부엌에 놓아두고 끼니가 없는 마을 사람들이 쌀을 가져가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쌀을 퍼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사람들의 자존심을 생각해 슬그머니 퍼갈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배려는 운조루의 굴뚝에서도 드러난다. 부잣집에서 밥 짓는 연기를 펑펑 피우는 것이 미안해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뒤주는 열고 굴뚝은 낮춘 운조루는 6·25전쟁 때 빨치산의 본거지였던 지리산 자락에 있었지만 화를 당하지 않았으니 대대로 나눔을 실천했던 정신이 운조루를 지킨 셈이다.
남한의 3대 길지 "운조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이곳에 낙안부사를 지냈던 안동출신의 유이주가 99칸 집을 지었다. 운조루라고 불리는 사랑채를 비롯한 이 집은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는데, 운조루가 자리한 터는 『조선의 풍수』 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구례 오미리에는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명당)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누정인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 이라는 뜻으로, 오미동 유씨 집안 사랑채 누마루의 당호다.
오미리마을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 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 뜨린 금환낙지의 형상이다. 이런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백 년 전부터 전해 내려왔다. 명성이 자자하여 이곳이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곳에는 위쪽에 금거북이 진흙속 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구몰니 (金龜沒泥), 중간에 금환낙지, 아래쪽에 다섯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오보교취(五寶交聚) 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중간 지대의 명당 금환낙지는 운조루가 이미 차지했지만, 금구몰니와 오보교취의 명당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칸(현재는 70여 칸) 저택이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400여 평의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주인이 거처)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歸來亭), 그 아랫마을 환동에 금가락지 같은 형국으로 높은 담벼락을 두른 채 대숲에 싸여있는 기와집 (박 부잣집) 한 채뿐이다.